사랑이라는 단어는 우리 가슴을 간질이는 무언가가 있다. 그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미디어에서 사랑받는 단골 소재이며 친한 사람들간에 가장 흔하게 관심 있는 주제이다. 사랑에는 다양한 형태와 의견이 있지만, 우리가 사랑에 관심이 많다는 건 분명해보인다.
하지만 낭만가득한 사랑 이야기가 나에게도 찾아올지에 대해 누구나 한번쯤 의구심을 가져본 적 있지 않는가? 정말로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줄 사람이 나타날까. 어느 흔한 커플이나 부부처럼 내가 겪을 사랑도 잠깐의 정열로 불탄 이후에는 서로에 대한 실망과 비난만이 남는 사랑인 건 아닐까. 어쩌면, 나같은 사람을 좋아해줄 사람은 없다고, 진정한 사랑이란 그저 우리의 성욕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을까.
이런 의구심을 가진 체 나는 이 책을 읽어나갔고, 왜 우리는 사랑에 대해 가슴 아픈 이야기를 반복하거나 그것을 환상으로 치부하는 냉소적인 인간이 되어버리는지에 대해 조금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한 연인의 흔해빠진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이 책이 다루는 건 연인의 사랑 뒤에 깔려 있는 욕망과 두려움이다. 여기서 나는 인간이 어째서 사랑에 빠지는지, 맺어진 사랑은 서로에 대한 실망, 간섭, 증오, 권태로 이어질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1. 사랑은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한다.
이야기는 영국 출신의 건축가인 주인공이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며 시작한다. 그는 옆자리에서 처음으로 만난 젊은 여성 디자이너인 클로이와 대화를 나누며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그의 머릿 속에는 점차 그녀의 밤색 단발 머리, 약간 울 듯한 눈망울, 대화할 때 보이는 재치와 약간의 미소로 가득차기 시작한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에는 다양한 정의가 존재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낭만적’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린다. 역사에서 사랑은 오랫동안 두 집안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생산력을 위한 선택중 하나로 여겨졌다. 반면, 서로를 향한 이끌리는 마음과 서로만을 바라보고 헌신할 의지가 우선시된 것은 오늘날 사랑의 주요 전제조건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만을 바라보고 헌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어찌 할 수 있을까. 미치도록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존재인 우리가 감히 상대에게 내 내밀한 마음을 드러내고 감정적으로 의존하겠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걸까. 현대 사회에서 연인이 교제하고 헤어지는 주기는 더 짧아지고 있다. 심지어 원나잇 섹스라는 아주 가벼운 사랑의 방식까지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사랑에서 영원한 마음과 헌신이 당연한 기대이자 의무로 여겨지는 것 같다. 우리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며 두 사람이 인생 마지막까지의 반려자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것을 기대한다. 서로가 서로 외에 다른 사람에게 이끌리고 서로를 향한 욕망이 뜨겁지 않을 때, 우리는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하지만 사랑의 영속성에 비해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는 판단은 너무 성급하게 이뤄지는 거 아닐까.
저자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통해 사랑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보여준다. 내가 어째서 널 사랑하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운명은 가장 흔한 대답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클로이를 만나게 된 것은 두 사람이 우연하게 같은 항공사에서 같은 시간대의 같은 출발지와 도착지의 서로 옆에 붙은 좌석에 앉게된 덕분이다. 이 기가막힌 확률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이 서로의 관심사나 대화방식과 농담, 특유의 미소를 보며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이해하고 포용해줄 거라 느끼는 걸 운명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이 사건을 우연 그 이상으로 치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은 확률적인 개연성 아래에서 생기며 대부분은 우연의 산물이다. 내가 특정 대학교에 갔던 것은 내 성적과 학교의 사회적 인지도, 그리고 나의 기호가 반영된 선택이다. 하지만, 내가 우연히 다른 더 좋은 학교에 끌렸거나 내 시험표가 조금 더 안 좋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너무 쉽게 필연적이라고 하는 것에 비해 삶은 수많은 불확정적 요소로 이뤄져 있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개연성은 있으나 확률적으로 발생한다. 그 모든 것을 운명이라 부르진 않는다. 대신, 우리가 믿고 싶은대로 서사를 부여하고 증거를 선별적으로 수집한다. 예컨대, 좋은 시절을 살아가는 역사가는 우리의 역사를 진보를 향한 과정으로 그릴 수 있고, 추락하는 시절을 살아가는 역사가는 역사 전체의 흐름을 퇴보와 멸망으로 그릴 수 있다. 인간은 인과에서 가장 확실한 대답인 우연과 개연성이라는 말을 싫어하며 자신이 원하는 이상을 삶의 의미로 부여하고 증명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주인공과 클로이는 두 사람 다 비행기를 탈 일이 제법 있는 직종(주인공은 건축가, 클로이는 디자이너)이고 둘 다 런던과 파리를 오고가는 일정이 있었다는 점, 서로의 환경은 달랐어도 최소한 대학 교육을 받으면서 모르는 사람과 적당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관심사나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이런 개연성을 운명이라 부르지 않았듯이, 이것도 그저 확률은 낮지만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유달리 사랑에 대해서 운명이나 영원한 사랑과 헌신같은 판단을 섣부르게 한다. 단 몇 시간, 며칠의 만남이 우리가 계속 함께 점심을 먹고 손을 잡고 산책하며 저녁에는 힘들었던 속마음을 토로하며 침대로 가 서로의 마음을 속삭일 수 있다고, 서로의 내밀한 슬픔, 외로움, 두려움을 공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랑을 시작하는가. 저자에게 사랑은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되는 섣부른 판단이며, 정열이라는 이름 아래에 상대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정당화하는 독특한 현상이다. 사랑에 대한 욕망은 유년기 시절의 따뜻하고 인자한 부모(혹은 그런 역할을 해주었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욕망과 비슷하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며 자유를 얻지만 동시에 선택에 대한 책임 짊어진다. 사회는 너에게 함부로 가르치려 들지 않지만, 니가 변덕스럽고 무능하다면 언제든지 널 대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너에게 주어진 삶은 표면적으로 자유롭지만, 사람들이 무언으로 바라는 기대와 성과에 맞춰 너 스스로를 억압하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삶 속에서 이유 모를 공허함을 느끼고 혼자 있는 밤이 외로우며
모두가 날 내버려두었으면 좋겠지만 내 속마음을 토로할 때 이해하고 안아줄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 그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마음을 난 사랑이라 부를 것이다.
2. 사랑이 실망으로 변할 때
우리가 사랑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은 대상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많은 연인들이 그렇게 서로에 대해 맞지 않는 점을 찾거나 실망스러운 부분들을 발견하고 말싸움과 흐느끼는 슬픔의 아픔 끝에 헤어진다.
기대, 실망, 비난, 헤어짐과 인연의 끝, 이런 현상은 어른의 인간관계에서 흔한 일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비즈니스적인 파트너, 동료, 상사 등의 업무적 인간관계를 만들고 사적으로는 친구와 교우하지만, 그들과 이런 파국적인 결말을 맞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는 흔히 ‘손절’이라 부르는 좀 더 조용하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어른스러운 결말을 선호한다. 우리는 나를 말이 통하지 않는 상사에게 울분을 터뜨리기 보단 미소를 띄우며 그를 어떻게 죽일지 상상한다. 동료의 무능한 모습에 대해서 대놓고 비난하고 지적하기 보단 웃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편을 선호한다. 친구와 아무리 친하더라도 그의 내밀한 사생활에 나의 잣대를 들이대며 싸우는 걸 정상적으로 보진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인간 관계에 비해 더 많이 기대하고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그 사람이 내가 그려오던 이상형, 내 결점을 보완해주는 탁월한 존재이자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해주고 안아줄거라는 직감과 기대이다. 그 기대는 처음 만나고 얼마동안은 유지될 수 있다. 한동안은 상대의 결점조차도 인간미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것을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존재로서 자기만족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점점 서로의 삶이 가까워질수록 현실적인 부분에서 서로의 이질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주인공은 클로이의 괴상한 패션이나 불쑥 튀어나오는 감정적인 연약함에 당혹한다. 클로이는 그가 생각이 너무 많고 종종 우울해지는 모습이 당혹스럽다. 우리는 내 사랑스러운 천사가 현실에서 나처럼 연약하고 때때로 당혹스럽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을 애써 무시하는 거나 참으려 하지만, 일상적으로 가까워진 관계 속에서 당혹감은 빈번하게 일어나고, 내 연인이 한심한 모습을 보이며 내 환상에 금을 내는 것에 점점 용납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면 우리가 연인에게 취하는 행동중 하나는 지적과 간섭이다. 우리는 연인에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을 조언할 것이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런 조언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키려 할 것이다. 하지만, 서로가 가까워질수록 조언은 공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까지 침습해온다. ‘너는 왜 그렇게 우울해하냐’, ‘너는 왜 사람들을 대할 때 소극적이냐’, ‘너는 왜 행정 업무를 처리할 때 불안해하고 짜증을 내느냐’.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가장 관대한 이해자일거라는 예상은 왜 이런 식으로 지적과 간섭으로 변질되는 것일까. ‘널 사랑하니까. 이러는 것이다’라는 이 말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사랑이라는 명분 아래에 너의 자아에 간섭할 수 있는 권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이고, 두번째는 내가 너에게 지적하고 권유하는 것들은 전부 지금보다는 더 나은 것이고 넌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랑이 연인에 대한 간섭의 권리를 부여한다는 생각은 아마도 서로가 더 많은 경청을 하고 관대하게 평가해주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 같다. 우리는 각자가 처한 위치에 맞게 직감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한다. 이에 따라 자신의 자아가 어디까지 표출될 수 있는지, 어느 선에서 사회적이고 좋은 사람의 가면을 써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독특한 점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기호를 표출하면서도 제 3자의 입장을 빌려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 패션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패션이라 생각하고 내 성격과 말투는 ‘사람들에게’ 유용하고 부담없는 방식이라 여기려 한다. 그래서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상을 투영하고 그것에 대한 지적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하는 것이다.
삶에서 보편적으로 더 옳은, 더 가치있는 선택이라는 건 존재할까. 이 논의에 대해서 가장 극단적인 주장은 냉소주의나 허무주의일 것이다. 그들은 삶은 단지 힘의 투쟁이며 도덕과 질서는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기 위해 그럴 듯한 선전 아래에 구축된 통치 질서라 말할 것이다. 현대 사회의 민주적인 사회 질서조차, 그들에게는 주류 집단의 기득권을 옹호한다는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이에 대해 반박하는 주장중 하나는 선택의 공통성과 윤리성을 제시하려 한다. 그들은 세상 만물에게 공평한 질서라는 건 존재할 수 없지만, 적어도 권력을 평등하게 나누려는 과정 속에서 점점 서로에게 공평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단 한명의 왕이 독점하는 권력보다는 수십 명의 귀족이 분담하는 권력이, 그보다는 수천 명의 유산 계급이 분담하는 민주주의가, 그보다는 수백 만명의 국민이 분담하는 보통 민주주의가 더 나을 것이다. 여전히 그 체제 속에서 소외되는 사람은 존재하고 누군가의 관점이 더 많이 반영될 수는 있겠으나, 상대적으로 더 공평하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 기준에서는 더 나은 투표 시스템이나 교통 질서, 세금 정책을 논의할 수는 있어도, 더 나은 성격이나 패션 스타일, 그리고 집안 청소 주기에 대해 결정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그런 사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의 옮음은 대부분 어린 시절 아직 주관이 뚜렷하지 않을 때 강력한 어른들(부모님, 친척, 선생님 등)에게 주입받거나 트라우마와 기억을 통해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잡는다. 이 경우에 옳음과 그름은 그저 개인의 선호와 취향을 더 높은 차원의 도덕 관념으로 둔갑하려는 욕망에 불과하다.
사회적인 위치에서 우리가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로 충돌하지 않는 이유는 이런 사안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가 없다는 걸 인지해서라 생각한다. 그건 관용이나 개인 취향에 대한 존중일 수도 있고, 애초에 그런걸 불쾌해할만큼 서로에게 관심이 있거나 삶의 영역이 겹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민감한 영역에 대해 함부로 말을 했다가 오히려 배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연인은 서로에게 개인의 이상형을 투영함으로써 서로가 내밀한 취향까지 동일할거라 기대하게 되고 너무 가까운 삶의 거리에서 몰랐던 서로의 이질성을 직시할 수 밖에 없으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사적인 영역에까지 잔혹하게 간섭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는 정답이 없으며 서로가 서로에 가장 관대한 이해자일거라는 기대를 접게 만든다.
이 시나리오에서 가장 긍정적인 결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무한한 기대를 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가 아무리 친밀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각자의 취향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스럽고 위로가 되는 면모들을 알고 있다. 그러니, 서로 이질적인 모습에 실망하거나 불쾌감이 들 때, 약간의 농담과 재치로 넘어갈 수 있다면 사랑이 그런 대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처럼 서로를 무한히 사랑할 거라는 기대감은 사그라들 것이다.
3. 두 사람의 마음이 융화되는 과정
연인이 서로의 이질적인 모습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두 사람은 속마음을 더욱 터놓고 대화하게 된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 마음은 가까운 인간관계일수록 사회적 가면을 벗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는 대신 더 취약한 모습을 드러내는걸까. 왜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투정을 부리고 그들을 당혹스럽게 할지 모르는 속마음을 드러내며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걸까. 왜 수많은 사랑 이야기들이 상대에게 내밀한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이 사람이 이래도 나를 사랑할까’라는 두려움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한다’라는 대답을 듣는 이야기를 내포하는 걸까.
사회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감정적으로 타인을 당혹스럽게 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반응에 부합하는 사람인 것 같다. 우리는 변덕스러운 사람을 싫어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여 타인의 의견에 부딪히는 사람을 거북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부딪히며 그들과 원만하게 지내기 위한 법을 익혀간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 속에서 내 입장과 내 감정에 충실하기 보단, 상대의 입장과 감정을 고려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못한 영역을 계산한다. 타인이 나의 패션이나 취향, 말투, 업무 능력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쓰는 건 이런 이유에서 아닐까. ‘눈치보지 마라. 나 다운 게 좋은 거다. 넌 있는 그대로도 아름답다’라는 메시지에 우리가 환호하는 이유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면서 억눌린 내 자아에 대한 불만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 조용한 삶을 동경한다. 하지만, 그런 고독한 삶이 정말 행복할까. 개인적으로 고독은 처음에 느껴지는 무한한 자유에 잠시 행복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오래되면 자신이 ‘썩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은 내가 공부를 하고 무언가를 노력할 때 특히 강해졌다. 내가 고민하며 얻어낸 지식들, 깨달음들, 성과들을 인정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내가 자격증을 딴 들, 책을 읽고 멋진 글을 쓴들, 그걸 보고 감탄해주고 인정해주며 조언해줄 사람이 없다면 이것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가 커뮤니티를 찾아가고 나의 삶에 대해 타인의 의견을 듣고 싶어하는 건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우리 자아는 주기적으로 타인의 반응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는 우리의 사회적 능력이나 성실성, 사교성 이외에는 그렇게 큰 관심이 없다. 모르는 사람의 유년기나 트라우마, 삶의 고통은 크게 관심을 받지 않는다, 미디어에서 다뤄질 때, 그것은 공감할만한 서사로 만들기 위해 작가들이 머리를 쥐어짜야 한다. 사람들의 선호가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이동할수록 타인의 비극에 대한 무관심은 깊어간다.
사회가 이토록 우리의 속마음에 무관심한데, 나에게 관대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아무리 중무장한 마음이라도 조금씩 풀리는게 당연한거 아닐까. 나를 보며 웃어주고 너그러이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내 앞에 있다면 그동안 속으로 눌러놨던 기쁨이나 두려움, 서운함, 공포를 말하고 싶어지는게 자연스러운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연인은 내밀한 자아에 대한 아주 희귀한 경청자이자 조언자가 된다. 연인 앞에서만큼은 동료와 상사들이 원하는 사회적 가면을 내려놓고 마음껏 내 속마음을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너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나를 사랑해줄 것이니까. 자아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 성숙해져간다. 가장 내밀한 마음을 봐주고 조언해줄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평생 불안한 속마음에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할 것이다.
타인이 자아를 평가해줄 때 좋은 점은 자기 스스로도 모르는 나에 대해 말해줄 수 있다는 점이다. 자아는 너무 연약해서 종종 자신의 결함을 왜곡해서 바라본다. 내 두려움은 신중함이라 말하고 사교성이 부족한 내 성격을 특별하고 개성있는 것이라 말하며, 내 게으름이나 무능함을 세상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 이런 자기방어적 반응은 우리가 삶의 동기가 되는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켜주지만 스스로가 편집증적으로 두려움을 가지거나 망상에 빠질 때 제동을 걸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나의 내밀한 자아를 보고 도망치는 대신 관용과 조언을 해주는 타자는 제동을 걸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스스로의 결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함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내 가치가 추락할거라는 두려움 때문 아닐까. 이 고통이 내가 특별하다는 증거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열등하고 평범한 한명의 사람일 뿐이라는 걸 인정할 때의 자기 혐오말이다. 하지만, 그런 나라도 불구하고 옆에서 바라봐줄 사람이 존재한다면 좀 더 괜찮지 않을까.
4. 헤어짐
앞에서 나는 사랑이란, 연인에게서 이상형을 발견했다는 기대, 그 사람을 통해 나는 근본적인 외로움을 해결하고 관대한 이해와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연인은 내 완벽한 이상형의 재현도 아니고 나를 무한히 이해해줄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저 나를 좀 더 관대하게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줄 수 있는 사람일 뿐이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의 삶에 대해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서 단편적으로만 들을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건 나의 경험, 그리고 상식, 그 상식이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문화적 맥락에 불과하다. 내가 콘서트를 가보지 않고서야 그것이 주는 심장박동이나 소속감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놀이기구를 무서워하면서 롤러코스터가 주는 짜릿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내 인생에 가장 짜릿했고 심장박동을 느꼈던 경험(누군가는 그걸 두꺼운 고전에서 감명 깊은 문구를 보았던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정도로만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서로의 한계와 이질성에 실망하고 싸우고 슬픔을 삭이다 보면 사랑은 처음과 같을 수 없다. 성적 관계를 동반한 우정 혹은 부모같은 반려 관계, 그 이상의 정열이 붙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불처럼 충동적으로 타오르는 욕망은 익숙한 것에게 생길 수 없다. 기본적으로 욕망은 ‘가지지 못한 것’이기에 타오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게임을 하다보면 너무나 갖고 싶은 것을 정석이 아닌 방식으로(거래나 치트 같은) 얻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만족감은 잠시일 뿐, 오히려 생각했던 것 만큼 그 행복이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면 욕망은 그 대상 자체의 가치에 비례한다기 보단, 그것을 얻어내기까지의 지연과정과 투자값에 비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책의 이야기에서 클로이는 주인공에 대한 열정적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느낀다. 분명히 그녀에게 그는 여전히 소중하고 날 이해해줄 수 있는 내게 정말 몇 안되는 친구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더이상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이 이야기에서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위로 받은 만큼 많이 실망하기도 했었으니, 그런 과정에서 사랑이 점차 마모된 것은 아닐까 추측만 할 수 있다.
헤어짐은 제3자의 관점에서는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는 것 이상으로 그 고통을 공감해주기 힘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상대가 너무 큰 슬픔에 계속 잠겨있지 않도록 도와주려는 마음에, ‘금방 잊을거야, 기운내, 어차피 헤어질만한 사람이었을지도 몰라’와 같은 위로를 건네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헤어져도 그 사람에게 별로 크게 감정적으로 의존하지 않았더라면 훌훌 털고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클로이에게 너무 많은 감정적 의존을 해왔었다. 그녀는 그가 말로하기 어려운 외로움을 알아채주고 두려운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굳게 닫힌 마음은 이미 풀려 있었고 그 자리에 있던 그녀가 떠나가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에는 어떤 극적인 반전도 없다. 헤어지는 순간에는 어른처럼 쿨하게 웃으며 친구로 남자 약속했고, 헤어진 후로는 인연이 끊겨버렸다. 그녀는 이제 잘 지낸다고, 미안하다는 편지 한통만이 와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 중 하나는 세상 밖에 사람들은 행복하고 평화로운데 나만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절망을 헤매고 있을 때다.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받고 있을까, 어차피 나는 아무리 해도 안되는 걸까’ 우리 마음은 직감이나 감정에 맞춰서 증거를 선별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와 행복하던 시절에는 내 삶이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들만 눈에 보였는데, 이제는 내 삶이 상승과 추락을 반복하는 것만 보였다. 상승이 크면 반드시 추락이 이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안에 어떤 기질이, 못된 성격이, 무능함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 그녀의 빈자리가 보였다. 나의 모든 것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없다. 이제는 그녀 없이 살아간다는 게 너무 두려웠다.
만약 이 이야기가 비극이었다면 이대로 삶을 비관한 주인공이 자살하며 우리는 삶에 대한 씁쓸한 교훈을 텁텁하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계속 사는 것을 선택했다. 죽는 게 무서워서라기 보단 죽어봤자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면제와 각종 비타민제를 들이키고 자살하려는 순간, 내가 이래 봤자 아무도 내 삶에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그저 뉴스에 한 줄짜리 기사로 잠시 지나가거나 통계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숫자 하나를 채울 뿐이라는 생각이 그를 다시 살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신은 주인공의 육체를 살리기 위해 다시 한번 그의 인식을 뒤틀었다. ‘사실 그녀는 생각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변덕스러웠고 자주 감성적으로 변했으며 내 능력과 내밀한 속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다, 그녀가 나를 배신한 것 뿐인데, 왜 내가 죽어야 하는가’ 자기혐오를 피하기 위해 타인을 무논리적으로 천박한 존재로 만듦으로써 그의 자아는 다시 살아야할 이유를 찾아갔다. 여전히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 마음이 공허해졌지만, 여전히 무심히 돌아가는 세상을 보며 점차 기운을 회복해갔다. 점점 그의 머릿 속에는 그녀와의 지난 추억들이 아니라 내일 있을 미팅과 업무, 어제 본 소설과 드라마, 전날 먹은 맛있는 식사 등이 자리를 대체해갔다. 그녀와의 기억은 추상화된 감정들과 몇 가지 장면들로 압축되어서 점차 잊혀져 갔다. 이제는 다른 추억들처럼 애써 떠올리지 않으면 굳이 떠오르지 않을 기억이 된 것이다.
이제 그는 다시 삶을 살아갈 것이다. 헤어짐의 상처로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겠다 다짐하기도 하고 사랑에 대한 책을 읽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보려고 하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다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사랑하며 약속을 잡으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5. 결론
사랑이라는 주제는 흔하지만 오히려 이것을 낯설게 바라봄으로써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먼저 저자는 마치 정신분석을 하듯이 우리의 자아를 욕망과 두려움으로 분석한다. 욕망은 자기 자신의 선호를 실현하려고 하지만, 사회적 시선은 우리 안에 내면화되어 질서와 억압을 하는 양심의 시선을 만들어내고 욕망을 억압한다. 두 정신의 줄다리기 속에서 형성되는 우리의 자아는 ‘내 욕망이 객관적으로 타당한가’라는 질문을 늘 하게 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냉소적인 시각에서 사랑은 육체적인 성욕의 우아한 표현으로 여겨지고는 하는데, 후기를 쓰는 나 역시 이런 시각에 가까웠던지라 ‘사랑은 근본적인 외로움에 대해 이해받으려는 욕망’이라는 저자의 시선은 흥미로웠고 ‘어디 한번 증명해보라지’싶은 오기도 조금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내린 결론은, 우리가 사랑하면 떠올리는 아름다운 서사들과 이야기들은 저자의 정의에 더 가까웠다는 점이다.
만약 사랑에 있어서 서로 덜 상처받고 더 오래갈 수 있는 지혜가 존재한다면 이 책은 어떤 지혜를 전해줄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있다면 좋았겠지만 이 책은 도리어 그런 것을 경계한다. 사랑을 정열이나 욕망, 파괴, 어린 시절의 애착에 대한 연장선, 금욕시 해야할 대상 등, 많은 철학자들이 정의한 사랑의 지혜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현실의 맥락에 상관 없이 무작정 절대시하는 것은 별로 유용한 태도가 아니다. 모든 형이상학은 인간의 마음과 삶의 복잡함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다보니 그들의 격언은 무리하게 밀고 나가기에 ‘이건 좀 아니다’ 싶을 때가 존재한다. 마치 실험실에서 사건의 인과가 현실에서 그대로 나타날 수 없듯이, 몇 가지 과학 이론이 모든 삶을 설명하고 예측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처럼 모든 걸 설명하는 매력적인 이론은 아니지만, 저자는 소피스트처럼 우리가 각 상황에서 사랑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면 더 나은 행동 방향을 얻을 수 있을거라 말한다. 나는 이것을 기술적인 지혜라고 말하고 싶다. 기술은 특정한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한 작업방식을 알려준다.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를 잘 모르며, 때로는 욕망과 두려움에 휘말려서 합리적이지 못한 결정을 내린다. 마음의 기술들은 이런 스스로의 변덕과 망상을 제어하고 주어진 문제를 안정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방법들에 대해 가르친다. 이런 기술들은 대개 종합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준다기 보단 다른 기술들과 유동적으로 조합되어 사용된다. 국어, 논리학, 수학, 수사학, 과학 등의 지식이 바로 그러하다. 하나하나 따로 보면 실제 삶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나 함께 사용됨으로써 문제를 분석하고 인과를 따지며 해결방안을 설득하는데 사용된다. 사랑은 우리가 가장 순진하게 판타지를 믿거나 너무 냉소적으로 아무것도 믿지 않는 영역인 것 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우리의 욕망을 어떻게 인식할지, 그것이 상대에게 주는 상처나 실망감을 해소하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는 저자 알랭 드 보통의 첫 작품이었고 사랑에 대한 그의 개념들은 나중에 차기 작품들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사랑과 인간관계의 3작품으로 ‘우리는 사랑일까’, ‘키스 앤 텔’이 있고, 사랑의 영속성과 관련해 결혼의 이야기를 다루는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우리의 불안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든 작품인 ‘불안’이 존재한다. 후기를 쓰는 나는 이 중에서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밖에 안 읽었는데, 오늘 다룬 이 책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마치 거미줄처럼 개념들이 연결되는 것 같아서 더 좋은 것 같다. 이 책이 제시해주는 사랑과 인간관계의 이야기에 공감한다면 한번쯤 이 책들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느꼈던 것은 이 이야기가 사랑의 이야기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삶을 살면서 우리의 욕망, 우리의 인식이 왜곡되는 과정, 두려움과 불안을 다루는 이야기, 행복과 어른에 대해 알 수 있는, 우리 삶의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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