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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서평, 요약/철학

종교 근본주의의 개념, 역사, 배경의 간단한 정리

서론.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근본주의

우리 사회에서 종교, 특히 개신교에 대한 논란들이 보이고 있다. 코로나 사태 초기에는 일부 교회들이 방역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예배를 강행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2019년에는 개신교 교단에서 동성애, 성소수자 옹호 발언을 한 목사나 신자를 색출하여 퇴출시켰고 강연을 금지시켰으며 동성애, 성소수자, 차별 금지법 등에 반대하는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였다. 또한, 2014년에는 기독교 청년들이 불교 사찰로 가서 시위를 한다거나 기도와 찬송가를 부르는 '땅밟기'를 하며 큰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행위는 대다수의 일반적인 개신교와는 거리가 먼 일부 극단적 신도들의 행태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2020)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묻는 질문에서 '한국 개신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63.9%로 나타났다. 이는 2017년 51.2%, 2013년 44.6%와 비교했을 때, 부정적 인식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추가로, 개신교의 주된 문제점에 대해서는 '베타성'을 지적하는 이들이 20%에 달했다. 이는 기독교와 베타성이 동일시된다는 걸 보여준다. 이런 사회인식이 무엇을 의미할까. 기독교의 베타성이란, 단순히 몇몇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대중의 일차원적인 오해에 불과할까. 아니면, 정말로 종교의 근본 자체에 내제된 베타성일까.
이 글은 근본주의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이런 문제들이 왜 발생하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정리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근본주의 용어의 탄생과 역사
  • 사람들은 왜 근본주의를 믿는가: 근본주의의 배경과 특징
  • 종교와 사회에 내제된 근본주의적 측면
  • 근본주의 문제 해결을 위한 구상

 

1. 근본주의 용어의 탄생과 역사

근본주의를 이해하려면 이 용어가 탄생했던 서구사회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19세기의 미국에서는 20세기 전반까지 걸쳐 기독교를 개혁하려는 사회운동이 벌어졌는데, 이들은 현대 기독교가 세속사회에 맞춰 교리와 의례를 왜곡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20세기 초 프린스턴 대학은 <근본원리들: 진리를 향한 증언>이라는 간행물12권을 발행하였고, 이 중에서 침례교 목사 '커티스 러스'가 이 운동을 최초로 '근본주의'라 불렀다. 이들에게 근본주의 운동의 목표는 근대의 자유주의 신학과 과학주의, 상대주의적 도덕론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건, 1979년부터다. 당시 '도덕적 다수'라는 보수조직은 민권운동이나 성소수자 운동 등에 맞서 강력한 기독교 질서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주장하였고,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미국 대선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 한편, 이란에서는 강력한 이슬람 교리 기반의 국가를 주장하는 세력이 세속주의 정부를 무너뜨리는 혁명이 발생했다. 이를 정치분석가들은 이슬람근본주의, 나아가 근본주의라 부르기 시작했고, 이 말은 언론을 통해 점차 퍼져나갔다. 이 때부터 근본주의는 성서를 절대적으로 믿고, 교리를 엄격히 수행하며, 영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위계체제에 충성하는, 세속사회와 타 종교를 적대하며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적극적인 집단으로 개념화되었다.
 

1) 현대 사회의 사상과 근본주의

근본주의의 표면적인 모습은 자기 종교를 믿지 않는 자를 배척하고 종교교리를 개인적인 자유를 넘어, 정치사회의 공적 규범으로 만들려는 움직임, 즉 '정화 운동' 내지는 '정교일치'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근본주의는 오랜 과거부터 존재했던 종교적 맹목성 혹은 광신의 일환일까. 학자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근본주의가 적으로 삼는 주요대상은 현대사회의 '세속화'와 '종교적 상대주의'이다.
세속화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사회학에서는 인간이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 기준으로서 관습, 미신, 종교를 참고하는 대신 과학과 합리주의를 이용하는 현상으로 정의한다. 즉, 통상적으로 의심없이 받아들였던 것들, 계급과 신분구조, 교회 체제, 사회규범 등을 단순히 '신의 의지라서' 혹은 '관습적으로 늘 해왔기 때문에'라고 판단하는 대신, 그것의 타당성을 논증하고 실증하려는 사고방식이다.
현대사회에서 세속화는 만물을 논리적으로 검증하려는 합리주의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믿으려는 과학주의 사고방식을 만들었다. 반면, 종교는 기존의 권위를 잃고 사적인 믿음의 영역으로 축소되었으며, 믿음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에 상호 간 종교를 침범하지 않아야했다. 이런 상황에서 19세기에 성장한 자유주의 신학은 성서를 무조건 참으로 믿는 대신, 역사적인 맥락과 인간학을 통해 검증하려 시도했다. 이는 자신의 신과 교리가 틀릴 수도 있으며 어떤 종교도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는 생각, 즉 상대주의적 관용성이 발전하는 걸로 이어졌다.
이처럼 과학주의, 합리주의, 그리고 종교적 상대주의의 발전을 보며 일부 종교세력은 종교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권위를 다시 사회에 복귀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근본주의이다. 근본주의가 지향하는 제일 핵심은 단순히 엄격한 교리나 베타성이 아니라, 근대적인 사조에 대항하여 절대적으로 옳은 교리을 찾는 것이다.
 

2) 분리주의와 근본주의

이렇게만 본다면, 근본주의란 근대주의에 반대하는 대항담론, 즉 '반근대주의'에 불과해보인다. 하지만, 미국의 종교 사회학자 '로버트 우스노우'는 근본주의가 그저 반근대주의에 불과했으면 고도로 근대화된 미국사회에서 그토록 성장하지 못했을 거라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근본주의는 근대화 산물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근대화의 세속화와 자유가 야기하는 심적인 공허, 즉 '도덕적 불확실성'의 불만을 해결해주며 성장한다. 근본주의는 이런 불만을 가진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신과 도덕, 확실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리고 이 가치체계는 근대적 산물을 토대로 세워졌지만 반근대를 주장하고, 전통적 가치와 괴리되어있지만 자신들이 전통임을 주장한다. 근본주의는 양 쪽 어디에도 소통하고 합의점을 보는 대신, 그들을 악과 틀림으로 규정하며 자신들만의 경계선 짓고, 사회와 분리시킨다. 이런 점에서 근본주의는 단순히 하나의 가치체계가 아니라 절대적인 선을 명분으로 폐쇄성을 지니는 분리주의이다.
 
 

2. 근본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이유, 불안의 역학

하지만, 이런 설명들은 어딘가 명쾌하지 않아 보인다. 현대사회의 세속주의나 종교적 상대주의가 불만이라 해서 모두가 근본주의가 되는건 아니잖은가. 또한, 근본주의의 교리에 담긴 폭력성이나 융통성없는 모습들, 비이성적인 측면들에 사람들은 왜 빠지는 걸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대사회의 구조에서 인간이 겪는 경험, 특히 불안의 측면을 탐구해야 한다.
 

1) 현대사회의 사회적 유동성과 근본주의

현대사회는 경쟁을 통한 사회계층 이동이 무척 자유롭다. 이는 분명 좋은 거지만, 다른 한편으론 더 높은 계층으로 이동하려는 각종 경쟁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이는 사람들에게 '내 위치가 언제든지 몰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또한, 계급 간에 경제적 양극화가 이뤄지고 대중매체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을 지속적으로 노출하며 상위의 삶을 '평균적으로 포장'하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뒤쳐짐에 대한 두려움과 내 삶이 평균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상대적 박탈감, 삶에 대한 회의가 발생한다. 사회신학자 슈테판 퓌르트너는 사회의 유동성과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삶의 구체적 지침이 없는 상황이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수요를 만든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들에게 근본주의가 말하는 보편적인 삶의 진리란, 매혹적일 수 밖에 없다.
 

2) 절대적 옳음, 명확함에 대한 욕망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이런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현대의 학문이나 도덕에서 답을 찾지 못할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학문의 자랑스러운 발전의 산물인 ‘논리적 엄밀성’과 관련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교리, 성서, 믿음’을 바라보는 자유주의 신학과 근본주의의 관점을 비교해봐야 한다. 자유주의 신학에게 교리란, 언제나 의심하고 검증해야 하는 영역이다. 교리나 의례는 그 전통이 가져다주는 권위에도 불구하고 미신과 오해, 기만에 의해 잘못된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성서 역시 마찬가지다. 종교의 원천인 성서 역시 특정한 시대의 문화와 사회적 맥락에서 탄생한 역사적 산물이므로, 철저히 검증해가며 해석해야 한다.
반면, 근본주의는 이러한 의심 자체를 불경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진리란, 자연과학적 법칙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진리를 담고 있는 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주력할 뿐, 성서의 오류를 상정해선 안된다. 성서는 언제나 무오류적이다.
이처럼, 성서라는 원천의 오류나 배경적인 제약 등을 상정하지 않음으로써 근본주의는 그들의 진리를 훨씬 더 명확하게 만들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이 논리적 엄밀성을 위해 신학, 철학, 언어학 등 각종 인간학으로까지 파고들어가야 한다면, 근본주의는 이를 포기함으로써 훨씬 더 즉각적인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자유주의적 신학은 이런 명확함이 곧 틀리기 쉬운 것이 지적하지만, 앞서 말했듯, 근본주의를 믿는 이유는 바로 다른 학문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명확함을 바라기 때문이다. 나아가, 근본주의는 성서무오류설, 진리의 초자연설을 통해 자유주의적 신학의 비판을 무력화시킨다. 근본주의는 비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생각과 다르게, 의외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상당한 이유는 바로 이런 명확함에 대한 인간적인 욕망과 관련있다. 이는 학문이 논리적인 엄밀함을 발전할수록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영역이다.
 
 

3. 근본주의와 폭력, 확장과정

위 정의로만 살펴본다면, 근본주의는 현대사회가 보장해주지 못하는 절대적이고 명확한 삶의 지침에 대한 욕망의 산물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근본주의가 보여주는 베타성을 설명하기 부족해 보인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 ‘다름’을 비판하고 교정하려는 욕구

현대 사회는 문화나 가치관, 인종의 다름을 관용적으로 허용하는 사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옳고 그름과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선하고 나쁜 것을 두고 끊임없이 논쟁한다.
이는 표면 상 객관적인 진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혐오로서 자기에게 익숙한 것을 옳은 것으로 관철하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철학자 푸코는 니체의 이론을 토대로, 사회가 정상적인 것을 발명하여 이질적인 것의 억압과 배제, 교정을 정당화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진리와 비판이란, 주체가 자기 가치관을 관철하려는 본능의 연장성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상대주의는 다름을 관용으로 허용해야할 영역으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의존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찾으며, 이질성에 대한 억눌린 혐오를 표출하고자 싶어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근본주의는 이질성을 혐오할 수 있는 출구가 된다. 근본주의 집단은 절대적인 진리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근거로, 타자의 이질적인 종교와 가치체계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한다. 이 정당화 메커니즘을 살펴보기 앞서, 우린 이런 메커니즘이 사회 곳곳에 보편적으로 잠재해있음을 볼 필요가 있다.
 

2) 사회 내 비판적 확장 메커니즘의 보편성: 근본주의와 다른 사회 요소의 차이

독일의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에 따르면, 사회의 모든 제도와 조직들은 확장 욕구를 가진다. 예컨대, 사법계는 합법과 불법, 헌법, 실정법 등의 기준 아래에 공론사안을 판단하는 반면, 학계는 진리, 거짓, 개연성 등의 규칙 아래에서 판단하고, 시장주의적 경제는 수익, 효율성, 공리의 관점에서 행동할 것이다. 모든 사회 영역은 각자만의 언어 규칙, 논리를 가지고 공론에 개입하며 사회의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려 한다. 자기중심적인 타자 비판과 확장의 권력작용은 근본주의를 포함한 모든 사회조직의 본능인 셈이다. 다만, 이 둘이 동일한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이런 영역들 간의 투쟁은 '소통'을 통해 상호간에 절충적인 규칙을 만드는 쪽으로 이뤄진다. 반면, 근본주의는 절충하지 않는다. 근본주의는 근대적 산물과 전통체제의 중간에서, 고유한 영역을 형성하고 영역 내의 규칙만을 절대적인 옳음으로 규정하며 사회 전반에 관철하려 한다.
근본주의가 비타협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집단 내부를 철저히 선함으로, 집단 외부를 악함으로 이분하기 때문이다. 외부에는 적들 뿐이며 내집단을 파괴하려 한다는 위기의식이 근본주의의 비타협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며 성전화한다. 내부로의 사랑과 외부로의 응징이라는 측면에서 이 도덕규범은 이중적이다.
하지만, 근본주의의 도덕규범이 가지는 이중성은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 도덕이 가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종교 신학자 ‘존 티한’에 따르면, 종교적 도덕이란, 내부적 결속 및 보호, 외부적 폭력 및 정복을 정당화하는 원천이다. 그것은 이러한 베타성은 수많은 종교집단들과의 투쟁 속에서 자기 집단을 지키고 외부로 확장해나가기 위한, 일종의 진화심리학적 산물이다. 마치, 나비의 날개나 기린의 긴 목처럼 말이다.
과거의 기독교는 히브리서에 따르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을 내집단에 대해 엄격히 지켰으나, 외집단에 대한 살인은 이교도에 대한 신의 의지로 정당화하였다. 물론, 오늘날의 세계기독교는 외집단에 대한 폭력을 장려하진 않으나, 단지 그 폭력의 주체가 현세의 개인에서 내세의 신으로 옮겨가고 이교도가 폭력을 당하는 시공간이 내세로 변했을 뿐, 종교의 근본적인 폭력과 신성화는 여전히 남아있다.
도덕과 폭력의 긴밀한 관계는 국가라는 정치집단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국가는 자기들만의 체제와 법, 규범을 만들고 이를 통해 국민과 타자를 교정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는 범죄자의 교정이나 외부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등 공동체 유지에 바람직한 기능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획일적인 교육 사상을 주입하거나 국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을 정당화하고 다른 의견을 탄압하기도 한다. 철학자 슬라보이 지젝에게 국가란, 최초의 건설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영웅담으로 포장하고 교훈화하는 집단이며, 벤야민은 사회적 관습과 규범이 특정한 폭력을 신화로서 장려한다고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근본주의는 한 사회가 의미체계를 절대적으로 신성시하고 관철하는 것, 절대적이므로 이질적인 것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과 유사하다. 근본주의는 어디서 갑자기 떨어진 게 아니라, 우리 사회와 종교에 잠재된 한 측면이다. 종교는 물론이고 국가 역시 근본주의로 전락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4. 극복방안

이처럼 근본주의는 인간적인 욕망, 사회의 확장 욕구의 극단화된 산물이며, 이런 측면에서 남 일이 아니라 언제든지 커질 수 있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근본주의를 무작정 부정하고 악마화하기 보단, 이런 문제를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1) 종교인의 비경계성

통상, 종교인은 현실과 유리되어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있다 묘사되나, 대개 종교인들은 직장과 학교, 친족, 친구 등 다양한 사회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종교적인 가치체계와 세속적인 가치체계가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종교인 스스로 각 영역의 규칙을 절충하고 자기만의 규칙으로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사학자 윌프레드 스미스의 주장은 중요하다. 그에게 종교란, 한 개인의 모든 성향을 규정하는게 아니라, 사회관계와 내면의 일부에 불과하다. 요컨대, 종교인은 불교인, 이슬람인, 기독교인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불교적인 이슬람적인 기독교적인 가치관의 사람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는 종교인 전체를 잠재적인 근본주의자, 혹은 반세속적인 인간으로 단정 짓는 일을 막아준다. 왜냐하면, 종교와 종교간, 그리고 종교와 사회 간 간극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소통으로 합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2) 종교적 관용의 재점검

철학자 지젝은 현재의 종교가 타자를 관용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선심을 가장하여 낮잡아보고 계도 대상으로 간주하는 태도라 지적한다. 많은 종교가 이해 없는 관용으로서 동정이란 명목 아래 타자를 그릇되게 여기고 있다. 이는 진정으로 자기 교리를 옹호하면서 타자의 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못하는, 그저 선심을 가장한 정복 전략에 불과하다. 따라서, 관용에 앞서 먼저 필요한 건 종교 간의 상대성을 이해하고 타자를 이해하려는 태도일 것이다.
 

3) 판단중지

이를 위해 필요한 건 먼저 자기중심적 교리에 대한 점검이다. 현상학자 후설은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통념에 의해 부여된 의미를 인식하는 거라 말한다. 즉, 인간은 자기가 보는 것이 진실이라 믿지만, 사실은 자기 사회의 특수한 의미 체계를 보는 것일 뿐이다. 객관적인 걸 위해서는 이걸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이처럼 기존의 사회적 의미체계에 의한 판단 보류를 ‘판단중지’라고 부른다.
판단 중지란, 단순히 판단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단 자신이 대상을 왜 그런 식으로 판단하며, 사회는 왜 그런 의미체계를 가지는지에 대한 재점검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객관성의 기저에 있는 특수한 맥락을 볼 수 있게 된다. 모든 인식이 각 사회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상대적 산물이라면, 타자의 인식은 타자만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산물이다. 즉, 그 누구도 보편성을 위시할 수 없는 상대적인 존재들인 셈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사회의 도덕이란 억압과 기만의 산물이기도 하므로, 더 윤리적이고 행복한 삶을 위해, 주체는 타자와 소통할 필요가 생긴다. 이제 타자는 교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소통을 통해 절충할 대상이 된다.
이런 방안들은 근본주의를 막을 수 있는 어떤 가시적인 뭔가를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소 불충분해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근본주의는 단순히 외부에서 침입해오는 적이 아니라, 내부의 잠재적인 욕망에서 발현된다는 점에서 사회 구성원의 사고방식을 개혁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악셀 호네트는 우리 사회가 너무나도 거대해지고 다양하게 연결되며 상호 간에 이질적인 가치들이 부딪히고 있는 상황이라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상호 간에 자기 가치 체계를 인정받으려는 ‘인정 투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베타성 등은 각자의 가치체계를 인정받지 못하게 만들고 불만을 증폭시킨다. 근본주의는 이런 불만에 기반한 수요라는 점에서, 이 불만을 해소할만한 사회가 되지 않는 이상, 근본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5. 이 글의 한계

이 글은 근본주의, 그 중에서도 종교근본주의를 정의하기 위해 사회학과 신학, 종교학의 관점을 이용했다. 그 정의는 절대적 진리의 욕망, 분리주의, 불안, 공격적인 확장과정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아렌트와 같은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전체주의’와 유사하다.
이 글의 한계는 이런 정의가 전체주의가 혼용될 수도 있다는 점, 이 둘의 차이를 역사적 사례를 통해 실증적으로 밝히진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며, 근본주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정재영, 「종교근본주의의 개념과 역학」, 『기독교사상 2011년 11월호(통권 제635호)』, 대한기독교서회, 2011년
이찬수, 「종교근본주의의 폭력적 구조」, 『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 63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5년
윤신일, 오세일, 「한국 근본주의 개신교인의 ‘4대 혐오’에 관한 연구」, 『한국사회학 제55집 1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