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는 어째서 냉소주의가 되었는가. <냉소적 이성 비판>#2
1. 계몽주의의 폭로에 관해
앞서 보았듯, 계몽주의는 기존 권력의 허구성을 드러내는데 탁월했으나 더 나은 대안적 권력을 제시하긴 어려웠다. 더욱이, 사회가 대중일반에 영합적이고 더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은 계몽주의적 폭로가 말하는 사회의 위선에 공감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기 싫어서, 그리고 더 나은 사회는 불가능할거라는 회의감에 의해 변화를 포기하였다.
그렇다면, 냉소주의는 구체적으로 계몽주의의 어떤 폭로를 통해 만들어졌을까. 이 장에서 슬로터다이크는 계몽주의의 폭로방식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1) 차가운 진실, 따뜻한 거짓
첫 번째 폭로 대상은 신에 관한 형이상학적 믿음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종교 교리의 근거가 되는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신이 존재한다는 근거는 성서라는 신물에 있으나 성서가 정말로 성스러운 신의 대필자에 의한 성물인지는 작성되었는지는 증명할 수 없다, 설사 신이 존재하더라도, 우리가 믿고 따르는 교리가 정말로 신의 뜻에 부합하는지, 아니면 신을 빙자한 인간의 거짓말일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일각에서는 신이 나약한 인간들이 세상의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보며 창조해낸 허상이라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신은 자연현상과 죽음에 대해 인간이 느꼈던 공포와 외경으로부터 탄생했고 종교는 이런 믿음을 체계화한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종교적 믿음은 허상에 기초한 것일 뿐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계몽주의의 말에 직접 반박하는 대신, 그들을 이단으로 치부하며 신도들의 믿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계몽주의의 폭로가 실패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그것이 종교의 허구를 보일 순 있었어도 더 나은 믿을거리를 제공해주진 못했다는 점이다. 대중이 진정으로 원한건 불안하고 힘든 삶 속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지 초라한 진실이 아니었다. 신도들은 삶의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귀를 닫아버렸다.
또한, 계몽주의 내에서도 종교가 사회질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는 이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종교적 믿음이 허구라도 그 믿음이 대중에게 질서와 도덕을 준수하도록 하여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냉소주의의 한 유형이 탄생한다. ‘목적도덕적 냉소주의’는 목적이 정당하다면 그 수단의 정당성 역시 인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계몽주의적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사회질서의 유지와 개인의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무엇이 더 쓸모있느냐다. 그런 점에서 진실보단 차라리 허위의식이 더 유익하다. 어차피 대중 대다수는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이니 진실을 알려주어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 보단 허위의식을 통한 질서 유지가 모두에게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2) 부패한 도덕의 유용성
두번째 폭로의 대상은 도덕이다. 도덕은 인간의 탐욕이나 본성에 충실한 삶을 거부하며 좋은 삶을 연구한다. 도덕은 사회가 서로 조화롭게 공생하는 방안을 고민하며 사람들의 자기반성의 계기가 되고 공적 영역에서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개가 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위치에 속한 사람임에도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도덕을 통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도덕은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중세 유럽에서 가톨릭 교회가 그러했듯 말이다. 인간의 성, 노동, 물질에 대한 열망은 억눌려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에 맞서 계몽주의는 마치 기자처럼, 도덕군자와 성직자의 민낯을 까발리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엄숙한 금욕을 행하는 사제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얼마나 음탕하고 탐욕스러운지를 폭로했던 것이다
나아가 계몽주의는 도덕이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마르크스는 도덕을 사회의 지배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명분, 즉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도덕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다. 그 증거로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집단들의 도덕이 상이한 이유는 그들의 사회를 지탱하는 환경과 생산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막 사회에 물과 자원을 엄격히 관리하는 가치관이 다른 곳보다 발달하는 이유는 그들의 이성이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원이 귀한 생활환경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근대 사회는 시민적 도덕으로서 그 착취적 구조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근대의 이데올로기는 생산된 재화의 분배가 자본가들에게 편중되어 있는 현상을 사유재산의 보장으로 포장하고 시민들은 모두 평등하니 너도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거라 속삭인다. 하지만, 이는 노동자들을 자본가의 생산자본에 성실히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사회는 학교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대중들에게 주입하며 그 구조를 유지한다.
계몽주의는 권위적인 도덕의 뒤에 숨겨진 이중성과 지배세력의 이해관계를 폭로하는 데 탁월한 성능을 보였지만 결국 한계를 드러내며 ‘보수주의적 냉소주의’를 산출했다. 이 냉소주의는 도덕이 지배자들의 착취 관계를 정당화함에도 사회 질서의 유지에 큰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계몽주의적 폭로가 설사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세운 새로운 도덕과 사회질서가 더 나을거란 보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의 청산을 부르짖으며 유토피아가 올 줄 알았지만, 현실이 된건 전쟁과 정치적 혼란, 무수히 많은 사람이 숙청당하는 공포 정치뿐이었다.
지금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대안적 체제의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는 점이 보수적 냉소주의가 주장하는 바였다.
물론 그들은 도덕의 이중성이 인간으로서 자연적인 성, 욕망을 억압한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이는 사회질서라는 대의를 위해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었다. 더 큰 혼란을 초래할 바엔 도덕이 가져다주는 작은 희생을 감수하는 게 훨씬 더 나으리라 생각했으니.
3) 세번째 폭로, 자유의지에 관하여
세 번째 폭로의 대상은 인간의 자유의지, 다시 말해 이성 그 자체다. 계몽주의는 이성을 통해 세상의 모든 걸 밝힐 수 있다고 믿었다. 이성은 내 안으로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었고 나의 밖으로는 보편적인 진리를 향해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을 파괴한 건 다름 아닌 계몽주의 자신이었다.
먼저 무의식의 발견은 이성으로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에 도전했다. 무의식은 어린 아이 시절의 경험과 관련해서 생성된다. 먹고 자는 원초적인 욕망에 솔직한 아이는 무한한 욕망을 가지지만 그런 욕망이 무한히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부모를 통해 배우게 된다. 따라서 아이는 부모의 규율을 내면으로 받아들이고 욕망을 억제하는 과정에서 자아를 생성한다. 아이 시절의 무한한 욕망은 이제 무의식이 되고 아이의 의식에는 자아가 남게 된다. 하지만, 무의식은 여전히 남아 인간의 자아에 영향을 끼친다. 무의식 이론은 합리성이나 도덕같은 이성적 사유가 그동안 금기시해온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제 이성은 자유로운 의지가 아니라 욕망의 노예로 간주되는 것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계몽주의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 사회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연구했다. 장 자크 루소 같은 사상가들은 봉건적 질서체계가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이 체계는 억압적 질서로 인간의 선한 본성과 가치관을 변질시킨다, 그는 빈곤이나 범죄가 부당한 사회질서가 만들어낸 구조적 문제로서 그 책임은 사회질서에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에드워드 버크같은 보수주의 사상가들은 이런 주장에 반문했다. 그에 따르면. 체제가 문제라면, 그런 체제를 무너뜨렸던 프랑스 혁명은 왜 정치적 테러와 숙청의 지옥이 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 본성은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엄격한 사회질서가 이들을 억누를 때가 가장 좋은 상태이다. 그들이 보기에, 범죄의 구조적 요인이란 말은 그런 요인 속에서도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범죄는 개인이 추악한 본성을 자제하지 못한 결과물로 개인의 책임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사회에 구속되는가에 대한 논쟁은 사회과학과 생물과학의 참여와 함께 더욱 치열해졌지만 냉소주의에게는 사회의 부조리한 일에 대해 두 가지 좋은 변명거리를 제공했다. 자신이 부조리의 가담자일 땐 자신은 선하며 모든 건 사회구조의 문제이니 내가 저지른 잘못 역시 구조의 책임이라는 변명, 부조리의 피해자 앞에서는 모든 건 그의 방만, 게으름, 선택에 따른 책임이니 자신은 아무런 사회적 책임이 없다는 변명.
2. 정리
사회의 부조리함과 그 이면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폭로했던 계몽주의는 진정한 문제에 도달했다. 그건 바로 자신들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지배세력이 아니라 그런 얘기를 듣고도 침묵하는 사람들, 즉 냉소주의였다.
냉소주의자에게 이 사회가 허위의식인지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진실과 거짓 어느쪽이 더 사회에 그리고 그 사회를 살아가는 나에게 유용한가였다.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냉소주의의 관심사는 신앙과 믿음에 대한 진실이, 사회의 도덕에 대한 진실이, 자유의지에 대한 진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보장해주는가이다.
냉소주의자는 현대 이전의 사회권력이 무너진 이유를 그것이 진실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기능적 관점에서 대중 전반에게 큰 해를 끼쳤기 때문이라 파악한다. . 반면 현대 사회의 달콤한 권력 체계는 이제 대중 상당수를 체계의 수혜를 입는 세력으로 편입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너희가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나아질 수 있을거란 희망을 심어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계몽주의적 진실이 나를 가해자로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환경 문제에서, 시민적 특권이라는 문제에서, 자본주의에서 나는 어느정도 혜택을 입는 동시에 가해자다. 따라서 이 체제의 거짓을 인정할지언정, 변화를 시도하는 건 곧 나 자신을 공격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자기 이익을 위해 냉소주의자는 계몽주의적 진실을 외면하고 사회의 위선에 협조한다.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때 계몽주의의 결말은 정해져 버린 것이다.
진실을 알면서도 체제에 협력하는 냉소주의라는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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