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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 해체 및 비판

tea-tea 2023. 1. 24. 17:10

과학자들이 새로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을 만들 듯, 철학자 역시 그러하다.

피로사회는 제목만 보았을 때 현대인들의 피로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한 개념들로 구성되어있다.

그렇기에, 개념들을 하나씩 풀어가며 살펴보겠다.

 

 

권력이론

한병철의 사회철학은 한 시대에 보편화된 사고방식(시대정신)에 대해 다룬다. 이 때, 시대정신은 사회 권력을 내면화한 자아의 일종이다. 시대정신과 권력의 문제는 피로사회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전제이므로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으나 간단히 짚고 가겠다.

 

1. 권력은 소유물인가

만약 권력이 뭐냐 물어본다면, ‘타인을 마음대로 하는 힘이라 대답할 것이다. 공권력을 예로 들자면. 권력은 법에 명시된 바에 따라 범죄자를 체포하고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며 벌금이나 징역, 심지어 사형같은 처벌을 부과할 수 있는 힘이다.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힘은 권력에서 나온다. 인간 대다수는 권력에 의해 자유의지를 제한당하지만, 예외적으로 권력자는 권력을 통해 자기 의지를 관철할 수 있다. 따라서, 통념상 권력은 타인을 제한하는 강제력이며 권력자의 의지를 관철하는 수단이다.

 

2. 지식으로서의 권력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현대 철학자 미셸 푸코에 의해 완전히 뒤집혔다. 푸코는 권력이 단순히 소유자(권력자)와 비소유자(피권력자)의 관계가 아니며 자유 의지를 억압하기만 하지도 않는다 주장했다.

 

먼저, 그는 인간이 권력에 복종하는 이유는 단순히 제재의 두려움이 아니라고 본다. 예컨대, 당신 앞에 연필이 있다고 가정하자. 당신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두가 연필을 보면 이걸 연필이라 인식한다. 그것의 용도는 당연히 뭔가를 쓰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 어떤 권력자도 너에게 이걸 그런 식으로 쓰라고 강요하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썼다고 처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은 오로지 연필로만 인식되며 그 용도로만 사용된다. 왜냐하면 지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푸코에게 지식이란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본질을 규정하는 작업이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물들은 그런 방식으로 본질이 정해진다. 우리는 나비와 나방을 다른 본질로 규정하지만, 누군가에게 이들은 빠삐용이라는 동일한 본질이다. 우리에게 물이란 수도를 틀면 언제든지 나오는 하찮은 재화이지만, 누군가에 물은 목숨을 걸고 싸워 뺏어야할 무언가일 수도 있다.

 

사회는 구성원에게 지식의 형태로서 권력을 주입한다. 지식은 부모님의 가르침, 학교, 친구, 직장, 뉴스 등을 통해 인간에게 내면화된다. 지식 권력이 물리적 권력보다 좋은 점은 내면화가 수월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어린 학생에게 위협으로 공부를 강요한다면 당장은 따르겠지만 반발심으로 인해 진심으로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부의 필요성에 대한 지식을 주입한다면(공부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던지, 미래에 더 많이 놀 수 있다던지) 좀 더 적극적으로 공부를 할 동기가 생길 것이며 반발심도 적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식은 근본적으로 권력이다. 본질이나 보편, 예의범절, 상식이라는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플라톤 이래로 서구 철학은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으며, 인간이 보고 느끼는 너머의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었지만, 푸코는 그런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보편은 단지 사람들이 반발하거나 의문을 품지 못하게 만드는 권력이라 간주했다. 지식은 물리적 폭력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한 권력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내면에 도덕이나 양심, 상식으로 자리잡으며 사람들이 그것을 권력이라 눈치채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권력의 힘은 권력의 비가시성에 비례한다.

 

3. 규율, 신체 정치

권력 이론에서 정치란 지식 권력을 사회구성원에게 보급하는 방식이다. 푸코는 전근대 사회의 정치를 가시적인 폭력에서 찾는다. 왕과 지배층들은 신민에게 통치질서를 강제하기 위해 군사력을 과시하고 범법자를 잔혹하게 공개 처벌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폭력의 가시성과 잔혹성은 공포를 매개로 권력을 보급하는 데 유용했으나, 반발감 역시 만만치 않았다.

 

반면, 근대 사회의 권력 보급 방식은 다르다. 예컨대, 학교는 예의범절, 역사, 공동체 정체성, 노동에 기초적으로 필요한 수학, 국어, 과학 등을 교육한다.

먼저 학생들은 모든 생활 패턴을 전반적으로 규율 아래 통제받는다. 학교에 도착하는 시간부터 시작해서 수업 시간, 휴식 시간, 운동 시간, 밥 먹는 시간이 정해지고 각 시간 내에서는 세세한 규칙들이 설정된다. 학생들은 이런 시간과 규칙, 그리고 수업의 성적을 기반으로 시험으로 언제나 평가받는다. 그 평가는 성적으로서 학생의 가치를 매기고 처우를 결정한다. 학교는 더 이상 가혹하고 가시적인 처벌을 하는 대신, 학생들에 대한 감시 범주를 대폭 확장하며 이에 불응하는 이들은 더 강한 규율을 강제하거나 혹은 아예 시스템에서 박탈시킨다.

이런 시스템 아래에서 학생들은 사소한 생활습관부터 가치관, 흥미, 활동 등 모든 걸 학교의 지식에 맞게 변형하며 권력을 내면화한다. 이처럼 폭 넓은 감시와 평가 시스템으로 학생의 아주 미시적인 신체 영역에서부터 규율하는 권력체계를 규율정치, 혹은 신체 정치라고 부른다.

 

부정성의 패러다임

한병철은 근대 사회의 권력 시스템을 부정성이라 부른다.

 

부정성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규율로서 제한한다. 이 때, 규율은 합리성, 진리, 본질, 지식의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한다. 물리적 폭력과 비교했을 때. 규율 정치는 주체의 내부에서 양심이나 도덕으로서 내면화된다. 그리고 내면화된 규율을 따를 때는 폭력에 강제로 복종할 때에 비해서는 자유의지가 덜 억압된다. 주체 스스로가 그것을 옳다고 여기며 억압을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욕망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폭력과 다름없다.

한병철은 근대와 근대 이전의 사회권력이 자유 의지와 욕망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으며, 이런 방식을 부정성 패러다임이라 말한다.부정성 패러다임에서 인간은 의무, 금지, 규율, 도덕에 둘러쌓여 있다.

 

부정성 아래에서 인간의 정신은 자유의지와 자유의지를 제한하는 사회적 양심으로 구성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의 사이에서 구성된다. 여기서 이드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자 욕망이며 먹고 자고 하는 것들이다.

반면 초자아는 사회의 규율을 내면화한 것, 즉 도덕이나 양심, 가치관이다. 이드의 욕망은 무제한적이고 사회와 자신마저 파괴하기 때문에, 사회는 부모님과 학교 등의 훈육으로 아이 내면에 사회적 규율을 주입한다. 이렇게 주입된 규율이 자아의 일부인 초자아로 자리잡는다. 자아는 이드의 원초적 욕망을 사회의 초자아로서 억압하며 형성된 균형지점이다.

 

부정성은 지식의 형태로서 사회에 이질적이고 위험한 것을 규정한다. 이 패러다임은 언제나 자기 사회를 파괴하려는 적들, 이민자들, 문화적 인종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며 자기정체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한다. 한편으로는 이질적인 것들을 자아에 친화적인 형태로 변형하여 수용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역시 자아를 어느정도 개방하여 외부의 것에 대한 면역력을 높이려는 목적이다. 이처럼 외부적인 것을 거부하며 적절히 자아정체성으로 변형하여 흡수하는 방식을 면역학의 항원과 바이러스의 관계에 빗대어 면역학적 패러다임이라고도 부른다.

 

긍정성의 패러다임

면역학적 패러다임 아래에서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 이외의 것들은 모두 억압당한다. 특히 주체의 욕망과 본능은 언제나 사회적 관습에 의한 억압 대상이었다. 특히 성적 욕망은 부르주아적 성 가치관에 의거하여 연애나 결혼, 가정 등의 영역에서 일정한 형식으로 규율되었다.

 

부정성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는 기성사회에 반발하며 자유로움과 개성을 중시했는데, 현대에 들어 이런 목소리가 힘을 얻으며 규제와 관습적 억압들이 철폐되고 자유와 개성이 지배적인 위치에 오른다. 이런 것들을 긍정성 혹은 긍정성의 패러다임이라 부른다.

 

자유와 개성이 보장되는 미래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이를 유토피아처럼 여겼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미래를 마음껏 그려나갈 수 있으며 자유로운 삶 덕분에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병철은 긍정성의 패러다임이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낫는다고 주장했다.

 

부정성 과잉과 질병

통념 상, 규율 철폐나 자유, 개성은 권력과 반비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긍정성 패러다임 역시 권력의 축소와 개인의 자유로 여겨진다. 하지만, 부정성 패러다임과 긍정성 패러다임은 권력 보급의 메커니즘이 상이할 뿐이다.

 

어떤 패러다임이든 상관없이 권력은 과잉될 경우 인간의 정신을 훼손하며 이를 질병이라 부른다. 부정성 패러다임에서의 질병은 면역학적 거부반응에 따른 적대성과 질병이다. 이 패러다임은 권력을 합리성, 진리, 문명 등의 이름으로 인간에게 의무와 금지를 강제한다. 이에 부합하지 않는 자들은 적으로 간주하며 배제한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면역학적 패러다임에서 지식 권력이란 적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이었다. 최초의 적은 마치 늑대처럼 물리적으로 위협적이지만 가시적인 존재였다. 적의 군대와 같은 이들은 힘의 크기에 걸맞는 방비 수단으로서 요새, 무기를 통해 대응되어 왔다. 하지만, 발전된 적은 쥐나 해충, 세균처럼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통로로 침입하여 질병처럼 보이지 않는 피해를 준다. 따라서, 이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기 보단, 이들이 다니는 통로 자체를 막는데 주력했다. 간첩같은 외부의 적은 국경선 전체의 검열로서 막아내며 내부의 적은 위생의 검열로서 막아낸다.

하지만, 더욱 발전된 적은 더 이상 피아의 구분마저 흐리게 만든다. 이데올로기적인 타자나 인종적 민족적 이민자는 아무런 적대성이 없더라도 그 이질성이 언제든지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제 적은 보이지 않은 영역에 있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적과 아군의 구분마저 모호해진다.

부정성 패러다임은 적의 발전에 맞는 적대적 배제와 제거 체제를 발전시켜왔다. 이는 거꾸로 시민들에게 아군임을 증명하길 요구하는 것, 즉 사회에 이질적인 존재이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규율을 따르고 주체성을 억압하길 요구해왔다다.

이 패러다임에서 개인은 자신의 원초적 욕망과 사회의 요구를 적절히 조율하여 살아남지만, 억압된 자유의 갈망은 커지며, 결국 욕망이 일탈과 정신병적인 히스테리를 낳는다.

 

긍정성 과잉과 질병

반면, 긍정성 패러다임은 주체에게 아무런 규율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규율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요소로서 점진적으로 철폐된다. 개인의 욕망과 개성은 존중되며 무한히 긍정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이 패러다임 아래에서 자유는 극대화된다. 이는 부정성을 비판하던 자들이 바래왔던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무한한 욕구긍정과 자유는 새로운 질병인 소진과 우울증으로 귀결된다.

 

1. 성과사회

긍정성의 패러다임이 왜 소진과 우울증을 야기하는지 알려면 성과사회에 대해 알아야 한다. 긍정성의 패러다임에서 사회의 유일한 권력은 뭐든지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어떤 욕망이든지 성공이든지 허용되며 이를 제약하는 것은 오로지 주체의 노력뿐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이를 실현하려 노력할 수 있다.

 

노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치로 객관화된다. 주체는 더 나은 성공, 더 큰 욕망 실현을 위해 자신의 노력을 성과로서 쌓아야 한다. 따라서 대중들의 관심은 성과을 효율적으로 내는 데 집중된다. 이를 성과사회라고 부른다.

이 사회에서 지식은 자기계발, 동기부여, 프로젝트, 창의성 증진에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자본주의 시장에게 환영할만한 것이었는데, 생산성을 위해서는 규율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노동력보단 알아서 움직이는 적극적인 노동력이 더 쓸모 있기 때문이다.

 

소비의 측면에서도 인간은 소비를 통해 개성과 자신의 가치, 자유를 더욱 증진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사회적 인정에 기반하여 살아간다. 아무리 타인의 신경을 쓰지 않는 인간이더라도 타자의 인정없이는 만족할만한 자아정체성을 가질 수 없으며 늘 자기 삶이 바람직한지에 대해 불안해한다.

 

2. 사회적 인정의 어려움

문제는 오늘날 사회가 그런 사회적 인정을 얻기 어렵다는 점이다. 규율사회에서 사회적 권력은 인간을 억압하지만, 반대로 그런 규율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도덕적으로나 양심적으로 안정된 자아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긍정성의 패러다임은 개인을 제약하는 그 어떤 출신, 계급, 도덕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성과와 개성이라는 기준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기준은 너무나도 높아서 우리가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다가설 수 없다.

 

규율 사회에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초자아에 억압되며 자아로 변형된다. 반면, 성과사회에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억압하는 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마저도 억압보다는 이상향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상향은 주체가 되길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이다. 현대 사회는 주체에게 더 능력 있고 아름답고 사교성있고 취미를 즐기며 쾌활하고 활동적인 인간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주체는 사회적 강요보다는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매혹 아래에 움직인다. 여기서 주체는 자신이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가꾸어나간다고 생각한다.

 

자아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이상향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기준은 너무나 높으며 사회적 인정은 얻기 어렵다, 오히려 그와 경쟁하는 수많은 다른 성과주체 속에서 자신을 초라하게 바라보며 이내 마모되어 버린다. 마모는, 쉼 없는 활동의 결과물이다. 쉴 틈 없이 성과를 쌓으며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였지만 이상향과 끝내 좁혀지지 않는 격차에 절망하는 상태다.

부정성 패러다임에서 주체는 극단적인 자유의 억압으로 원초적인 자유의지와 욕망이 폭발할 위험성에 놓여있다면, 긍정성 패러다임에서 주체는 사회가 광고하는 이상향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가다 지치고 쓰러져 절망하는 상태, 즉 번아웃과 우울증의 위험에 놓여있다.

 

 

성과사회의 유지 원인 분석

1. 자유와 성과 주체의 관계

부정성에 폭발한 자아는 시스템을 적으로 삼으며 저항한다. 하지만, 긍정성에 마모된 자아는 적으로 삼을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과를 향한 달림은 결국 이상향에 매혹된 자신에게 책임있기 때문이다. 결국, 주체는 모든 선택은 자신이 했으며 자기 노력의 부족만이 문제라 간주하게 된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힐링서적들이 말하듯, 문제는 약한 나의 탓이 되어버리고 자아는 자기자신을 학대하며 악순환은 반복된다. 따라서 긍정성의 과잉에도 불구하고 이 패러다임은 각자의 선택이라는 변명 아래 비난받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

 

2. 주체성의 부재에 관해

다만, 성과사회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이미 한국사회를 비롯한 사회비판계에 존재해왔다. 이들은 성과를 향한 강박적인 경쟁이 완전 고용이 불가능한 시장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라 말한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 대한 분노가 연대하여 정치적 움직임으로 단합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한병철의 독특한 점은 이러한 분노와 연대, 정치적 행위들이 이젠 불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그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규율사회를 주체가 비판하며 철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규율사회의 권력이 자아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모든 도덕과 합리성이 권력일 뿐이며. 주체를 특정한 방향으로 억압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지식이란 주체가 더 나은 삶과 행복을 찾아가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지식권력을 의심하고 적절하게 가려 받아들이는 판단력, 즉 주체성을 가져야만 한다.

하지만, 저자는 성과 사회 아래에서의 개인들이 주체성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개인들은 사회가 선전하는 이상적인 외모, 건강, 재력, 노동을 자아정체성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은 사회가 만든 이상향을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이상향으로 착각하며, 여기에 문제가 발생하면, 잠시나마 짜증을 부릴 뿐, 결국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문제로 삼으며 자학하게 된다.

 

3. 심심함의 부재

주체성의 상실은 긍정성의 과잉에 따른 심심함의 상실에 의해 발생한다. 먼저 우리 삶은 과거에 비해 풍요로운 컨텐츠를 누리는 덕분에 심심함을 느낄 틈이 없어졌다. 이젠 공부할 때나 쉴 때, 걷고 있을 때, 심지어 잘 때조차 뭔가에 몰구하고 있다.

 

심심함의 상실은 곧 주체의 사색적 계기의 상실로 이어졌다. 심심함은 주체에게 불안정한 기분을 주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해 몰두할 새로운 뭔가를 찾게 만든다. 이때 자아는 사색의 계기를 얻는 것이다. 사색이란 당연시되는 상식을 내려놓고 삶과 세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때 마음은 열리며 새로운 것에 경청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불안이 자기 삶의 의미를 성찰하는 계기라고 말한다. 삶의 의미는 대개 부모나 학교 등을 통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입된다. 하지만, 인간은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정말로 이것이 내가 원하는 삶인지 불안해하게 된다. 대개는 이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놀이거리를 찾지만, 이런 불안을 내버려둠으로써 우리 삶이 어떤 권력 아래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고 주체적인 삶을 계획할 수 있다.

 

이는 사색이 가지는 두 가지 기능에 기반한다. 하나는 사색이 사회적 가치체계가 말해주지 않던 것, 예컨대, 고요한 자연의 아름다움, 적적한 풀소리의 편안함,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때의 여유로움과같은 사소하고 무시되던 것들의 가치를 보여준다는 것다. 다른 하나는 사색이 더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삶, 좋은 미래를 상상하는 힘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색의 계기인 심심함을 잃은 사회는 그 어떤 대안적인 가치나 미래, 즉 주체성을 기를 여지를 주지 않는다.

 

4. 삶의 탈서사화, 노동의 정체성화

아렌트는 인간의 행위가 근대사회에 노동으로 전락하였다고 비판한다. 본래 행위란 새로운 걸 산출하는 것이었다. 나무나 돌에서 책상이나 망치를 만들 듯이, 행위는 사색에 기반하여 새로운 걸 창조하는 기능이었다.

하지만, 근대 사회에 이르러 인간은 행위의 창조성을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자기가 스스로 문제와 방법을 고민하는 대신, 전문지식에 의해 산출된 메뉴얼을 따르는 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색은 새로운 걸 고민하는 정신행위이 아니라 기존 지식을 외우고 따라가는 작업으로 전락했다. 따라서 행위는 오로지 합리적 공정과 생산의 효율에만 초점 맞춰졌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의 성과사회는 생산물을 넘어 인간의 의미 역시 역시 생산성과 노동으로 대체된다. 노동은 더 이상 삶을 지속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노동이 곧 삶의 목적이자 가치이며 기준이 되어버린다. 자아에게 유일하게 가치있는 일은 생산성을 늘리고 개성을 다듬으며 자아의 가치를 올리는 일뿐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아는 노동만이 이 사회의 유일한 미래라고 믿는다. 나의 행복은 오로지 노동사회가 만드는 풍요로운 생산물에 있으며 노력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의 과부화와 마모에 대한 분노는 생성되지 못하며 일시적인 짜증과 순응으로 귀결된다.

 

정리하자면, 긍정성 패러다임 아래에서 우리는 성과와 개성이 곧 행복과 삶의 의미에 직결된다는 믿음 아래에 자신을 자유롭게 몰아붙인다. 하지만, 사회가 설정한 이상적 모습은 너무나도 달성하기 어려워 주체는 결국 과부하로 지쳐 쓰러진다. 그러다 남은건 여전히 초라한 자신을 보게 되며 절망하고 우울증에 빠진다. 이런 체제 자체를 바꾸려는 의지는 쉽게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에는 성과사회 밖의 미래에 대한 어떤 발상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부족한 노력, 부족한 능력, 부족한 개성을 탓하는 자학의 악순환에 빠진다.

 

대안

1. 사색적 삶의 회복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사색적 삶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색적 삶의 회복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분노할 수 없다. 그저 이런 사회에 대한 일시적인 짜증만 낼 뿐이며, 냉소적으로 자기합리화를 하거나 우울증과 번아웃으로 망가질 수 밖에 없다.

 

사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고 느끼는 법을 새로 배워야 한다. 우리 정신은 사회를 통해 뭔가를 보고 느끼는 법을 주입받아왔다. 사회는 우리에게 합리적으로 보도록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상품에 열광하도록 그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다. 하지만, 사색을 위해서는 이런 즉각적인 반응을 잠시 유보해야 한다.

긍정성의 패러다임에서 우리가 유보해야할 건 능력, 개성, 성과, 욕망에 대한 것들, 즉 그것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건지, 세상이 말하는 성과 없이 내 삶은 정말로 가치 없는 건지, 상품에 의존하는 개성과 아름다움이 정말로 가치있는지에 대한 확신이다.

유보는 당연한 것이 왜 당연한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긍정성이 과거에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현재 우리에게 어떤 빛과 그림자가 있는지, 그보다 더 바람직한 미래는 없는지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사회가 보여주려 했던 것들 너머의 소외된 가치, 소외된 문제들을 찾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사색은 긍정성의 권력 대신 주체적인 삶을 구상할 수 있게 만들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분노와 연대의 토대가 된다. 이때가 돼야 비로소 수동적인 순응이나 냉소적 조소를 끊어낼 수 있다.

 

2. 부정성의 피로

하지만, 사색의 회복을 위한 유보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미 우리는 컨텐츠의 과잉 속에서 이미 심심함을 느끼거나 불안에 직면할 능력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이를 위해 저자는 피로에 주목한다. 이미 우리는 성과를 쫓으며 피로에 절어있지만, 저자가 말하는 피로는 그것이 아니다. 피로는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하나는 성과사회의 주체가 느끼는 피로, 다른 말로 하면 소진이다. 소진은 규율이 과도하게 활동에 몰두하며 생기는 증상이다. 이상향을 향해서만 미칠 듯이 달려간 나머지, 어느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은 피곤한데, 아직도 이상과는 거리가 먼 모습에 지쳐쓰러진다. 하지만, 모두가 이상적인 자신을 향해서만 달리는 사회에서는 힘든 나를 위로해줄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폭넓은 친구 관계는 서로의 좋은 모습만을 게시하는 데 익숙하나 초라한한 모습을 보여주지도 보지도 않으려 한다. 자아는 혼자만의 고민을 안고 가라앉는다.

 

다른 하나의 피로는 부정성의 피로이다. 저자는 한트케의 말을 빌려, 또다른 종류의 피로에 관해 얘기한다. 인간의 사유는 부정적 계기와의 직면으로 시작된다. 긍정성의 사회에서 인간이 부딪히는 부정성은 곧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자기 자신과 불행함이다. 이런 불행과의 직면이 긍정성이 정말로 의미있는가에 대한 회의감을 가져오고 사색을 시작한다.

만약 주체가 혼란에서 오는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다면, 그동안 굳이 관심가지지 않았던 세상, 하찮은 햇살과 돈과 젊음 없이도 웃을 수 있는 사람들, 성과경쟁의 밖에서도 존재하는 행복, 연대의 가치와 같은 것들을 느낄 지도 모른다.

그때 주체는 긍정성이 만들어낸 이상향이 행복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는 직감, 따라서 내려놓아도 된다는 무위에 대해 깨닫는다. 현대 세계는 돈, 자기계발, 노동 등의 요소를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설정했지만, 무위의 깨달음은 이를 반문하며 삶의 의미를 새롭게 설정한다.

사색하고 관조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이상자아에 매몰되어 살아가지 않는다. 그는 권력 너머의 새로운 삶에 대해, 바람직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이 자아 밖의 세상, 타자의 소중함과 하찮게 여긴 것들의 가치를 새롭게 매기도록 만들며 연대의식을 만들어낸다. 그때서야 우리는 분노할 수 있는 힘을, 세상을 새롭게 바꿀 힘을 얻는 것이다.

 


비판 및 의의

다음은 해당 책에 대해 다른 글들을 참고한 비판점들이다.

 

비판1. 부정성의 패러다임은 정말로 철폐되었는가.

이 비판자들은 한병철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부정성의 패러다임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특히 성과주체는 여전히 부정성의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성과 주체는 성과를 올려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의무 속에서 살아간다.

더 많은 노동, 더 많은 자기계발을 자아에게 요구하는 초자아는 개인의 원초적인 욕망을 억누르며 그들에게 잉여 인간이 될 두려움을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그렇다면, 자아는 여전히 부정성 아래에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성과주체의 행위를 성형에 비유한다. 성형은 아름다워지려는 욕망, 나아가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 자기 가치를 높이려는 욕망에 근거한다. 오늘 날, 성과주체들이 자기 계발을 하고 몸을 꾸미고 노동을 하는 건 사회적 인정을 위한 이상적 모습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이다. 이는 단순히 누군가의 명령, 두려움과는 다르다. 명령이나 뒤처짐의 두려움은 자유를 억압하지만, 성과주체에게 사회가 만드는 이상자아는 오히려 너의 자유의지를 따라 움직이라고 요구한다. 단지 그 자유의지 자체가 사회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자유의 감정이 억압되느냐 아니면 특정한 형태로 과잉되고 자극받느냐는 부정성의 패러다임과 긍정성의 패러다임을 좌우하는 요소다.

하지만, 한병철이 오늘날 시대진단을 너무 긍정성으로 일반화시킨다는 점은 필자도 공감이 된다. 대부분의 역사는 단순히 하나의 시대정신만이 지배하지 않는다. 종교의 권위가 몰락했다는 근현대에 조차 종교는 나름의 방식으로 생존해가듯이, 우리사회는 부정성과 긍정성이 공존하는 시대로 좀 더 입체적으로 묘사해야 맞을 것이다. 이런 부분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도식적 한계로 보인다.

 

비판2. 사회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개인의 탓으로 환원했다.

한 글에서는 한병철이 성과주체를 마모시키는 시스템 자체에 대해 분노하기 보단, 주체성을 잃은 개인의 탓으로 본다며 이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는 아무리 개인이 각성하여도 사회는 저항적인 개인을 해고하고 대체하면 될 뿐, 시스템 자체의 개혁없이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예컨대, 사회 초년생들이 주체성과 사색을 가지고 과부화와 마모적인 삶을 거부한다면, 시스템은 그저 이런 사람들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면 그만일 뿐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책은 단순히 사회 시스템에 분노하지 말란 내용이 아니다. 분노로서 세상을 바꾸고 싶지만, 더 이상 사람들은 분노하지 못하며 그 원인이 개인의 주체성 상실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잃어버린 주체성을 되찾기 위한 개인의 사색적 삶의 회복이 먼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슬로터다이크가 냉소주의적 이성 비판을 쓰면서,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바꿀 계몽주의적 지식은 충분하나 이를 적절히 받아들일 정신의 부재, 즉 냉소주의 만연을 비판한 것과 비슷하게 개인의 문제를 좀 더 핵심적인 원인으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

 

 

의의

이 책은 사회비판을 너머 왜 사회비판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바뀌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한다. 긍정성의 사회에서 자유의 억압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성과 요구 자체가 개인의 자아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개인이 자아에 따라 산다고 착각하는 세상 속에서 자유의 억압에 대한 불만은 싹트지 않는다. 그저 개인의 노력 문제로 환원될 뿐이다.

 

피로사회에서 제기된 주제들은 다른 책들에서 좀 더 세밀하게 다뤄진다.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 패러다임으로의 교체는 <타자의 해방><아름다움의 구원>, 다른 비판들에서 강조되었던 주체의 뒤쳐짐에 대한 두려움은 <투명사회>, 사회권력이 이상향으로서 자아를 끌어들이는 매커니즘은 <심리정치>에서 자세히 다뤄진다.

이 책에 흥미가 있고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한번 쯤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